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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도시 "위어 워커" 표식
[402일 차] 나의 깃발을 들어라. —군체 전쟁의 신 시부 아라스
슬론은 무릎을 꿇었다. 일어설 수가 없었다. 시부 아라스의 의지가 그녀를 짓누르는 압력에 비하면 타이탄 바다의 수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굴복자 기사를 둘러싼 야비한 군체 무리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기사는 그녀 앞에 우뚝 서서, 위압적인 칼자루에 고정되어 날카롭게 벼려진 흑요석 검을 휘둘렀다. 칼자루의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악문 잇새를 뚫고 들려왔다. 피가 내달리듯 열성적인 어조였다.
[하늘의 전사, 너의 힘은 기울고, 너의 전략은 뻔하다.]
[네가 말없이 훔쳤으니, 이제 내가 널 취하겠다.]
[다시 한번 무너진 하늘이, 밤의 검으로 고정되었다.]
[메마른 빛을 소환해라. 하늘은 속박되고, 넌 패배하였다.]
투영에서 흘러나온 시부의 목소리는 검은 대지에서 비명을 지르는 공포와도 같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너의 운반자가 널 필요로 한다, 고스트.]
[용감해져라.]
슬론은 방어구 틈 사이로 바늘이 근육에 박혀, 파워 슈트 깊숙이 박힌 리벳이 뼈에 붙은 채로 천천히 벗겨지는 것을 느꼈다. 느리고 고통스러운 끝을 향한, 폭력적인 해체였다.
시어칸은 바위에 몸을 숨긴 채 고문을 지켜보며 얇은 칼날을 길게 뻗어 공격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슬론은 진홍빛이 어린 안개의 구름 속에서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정신착란과 고통이 슬론의 정신을 지배했으나, 그 전쟁의 불협화음을 뚫고 한 가지 제안이 뇌리에 꽂혔다. 마치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마음속으로 들려온 제안이었다. 저버린 약속이었다.
|결속해|
|살아라|
그녀는 고민했다.
시어칸이 앞으로 돌진했다. 더는 지켜볼 수 없다는 듯, 칼날을 휘두르며 노예 떼를 마구 헤쳐 나갔다. 슬론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그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시부 아라스의 흥분한 웃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이 작은 조각은 내가 삼킬 것이다.]
완전한 오닉스의 창이 바다로 돌진하더니 작은 빛을 찔렀다. 대지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앞으로 솟구쳤다. 잠시 동안 시어칸은 시부 아라스가 육신의 손으로 검을 휘두르며 직접 검은 대지를 뚫고 나올 거라 생각했다. 전쟁의 존재는 그런 힘을 발산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신, 거대한 뱀이 투영을 뚫고 솟아오르면서 동굴 같은 입으로 기사를 집어삼키자 대지와 기사의 연결은 산산이 조각났다. 폭발한 영혼불꽃이 메탄을 뚫고 대지를 삼키며 스스로를 붕괴시키자 투영 또한 폭발했다. 뱀이 잠수하여 그 거대한 형상을 드리우자 무너지는 대지의 투영조차 작아 보였다. 뱀은 위에서 몸을 뒤틀며 꼬리 일부를 펼쳐 수많은 군체를 쓸어버리고, 퇴적물 기둥을 짙고 부연 먼지 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슬론이 쓰러지자 시어칸이 얼른 옆으로 달려가 시종이 파쇄기를 들어올리기 전에 베어 버렸다. "가야 해요! 일어나요!" 시어칸은 소리치며 피가 솟구치는 슬론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최대한 뼈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그들 주변으로 군체가 바닷속에서 격렬하게 사격을 퍼부었다. 죽음에서 생겨난 영혼불꽃이 액체 메탄과 반응하면서 작고 조용한 폭발들이 일어났다.
시어칸이 슬론을 일으켜 세우기 전에 뱀이 둘을 덮쳐 배 아래로 넣으며 군체의 보복 공격을 막아냈다. 시어칸은 이 거대한 짐승에 맞서기 위해 칼을 장전하고 슬론 앞으로 돌진했지만, 뱀은 그저 타이탄을 바라볼 뿐이었다. 커다란 뱀의 눈은 사람 셋을 나란히 놓은 것보다 컸다. 또다시, 슬론의 머릿속에 약속이 들려왔다.
|결속해|
|살아라|
그렇게, 그들은 협정을 맺었다.